09.09.22-배신의 계절, 그리고 생체실험 (늦은 개강인사)

개강과 함께 KCEF를 새롭게 꾸민다는 것이 늦어졌습니다. 학기 초라 바쁘기도 하고, KCEF를 새롭게 끌고 갈 계획을 짜는 일이 쉽지도 않고...(다 변명, 게을러서 그랬습니다)

정말 진짜 이유는 제가 지난 2주 "생체실험"을 하느라 다른 일에 신경쓸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이 자연과학적인 도구를 많이 응용하지만 그래도 자연과학과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실험실"이 없다는 점이지요. 예컨대 정부가 어떤 정책을 쓰면 그 결과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 다른 정책을 써 볼 수 있다면 '실험집단'과 '통제집단'의 비교가 가능하겠지요. 하지만 경제현상은 이것이 가능하지 않지요.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자연실험'을 좋아한답니다. 즉, 늘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 보다는 큰 변화가 있는 것이 좋지요. 나름 분석을 할 여지가 많아지니까요. 그래서 외환위기가 발생하면 경제학자들이 무능하다고 욕을 먹지만, 정작 이들에게는 할 일이 많아지지요.

여러 분도 살다가 문득 진부해진 일상을 느끼는 경우가 있으시지요. 이럴 때 변화를 주어보는 것도 좋습니다. 저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제 몸이 깜짝 놀랄 변화를 시도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길일을 잡아(지난 2009년 9월 9일), 몸에 필요한 3대 영양소를 당분간 투입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늘로 꼭 2주가 되었습니다.

정말 처음 며칠은 대뇌가 작동을 거부하더군요. 며칠 그러다 말겠지. 지가 어떻게 버티냐. 몸 또한 휴업상태로 들어가 혓바늘이 돋고 몸살기가 생기더군요. 그래도 굳건히 3대 영양소 공급을 끊었더니 시간이 지나며 몸과 머리가 사정을 하기 시작하더군요. 아쉬운 대로 하나라도 다시 공급해 달라고...

아, 이 3대 영양소를 오늘 수업 중에 말했더니, 많은 학생들이 지방, 단백질, 탄수화물 이렇게 상상하더군요. 에이~ 그걸 어떻게 2주나 끊습니까. 내가 단식농성하는 것도 아니고. 아시겠지요? 뭔지.

우선, 이 셋 중에서 내 몸(특히 머리)이 가장 절실히 아쉬워한 것은 커피였습니다. 그 다음이 담배, 의외로 술이 3위였습니다.

저는 담배는 밖에서는 거의 피지를 않고 대부분 집에서 글 쓰다 갑갑하면 피는데 한번 시작하면 그 자리에서 한 갑 내리 줄담배로 핍니다. 술 역시 자주 마시지는 않습니다. 별로 폭음하지도 않고. (물론 술 유사품인 맥주나 와인은 평소 기호품으로 즐깁니다). 커피는 하루에 두 번 한 통씩 다려 마시지요.

문제는 이 중 하나를 멈추는 것은 전에도 가끔 했습니다. (술을 한 두 달 끊는 것은 가끔 합니다. 담배는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하지만 커피는 거의 끊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 실험의 새로운 시도는 모두 다 한꺼번에 끊어보면 몸이 어떻게 될까...이거였습니다.

아직 2주 정도 됐지만, 뭔가 과거와는 다른 변화를 느끼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변화를 주고 싶으면 새 카메라를 장만하거나, 여행을 하거나, 모임을 만들거나 등 뭔가 능동적 자극을 주는 식을 택했는데, 이번에는 수동적으로 지금 가진 것들을 버리는 방식을 택한 것이지요.

이런 수동적(?) 자극이 주는 효과가 참 미묘하고 섬세하고 은은해서 뭐라고 말하긴 힘들지만 한 마디로 “좋다” 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심각한 고민 없이 아침 햇살 받으며 삶이나 행복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평생을 투쟁하듯 부딪쳐온 공부가 재미 있어 지기도 합니다(!!).

글쎄요, 이 여세를 몰아 그 동안 '끊었던' 글을 다시 쓰게 되면 얼마나 좋을지....학생들을 위해 쓰는 칼럼인 대학사계나 세상에 대한 저의 관조를 담은 세상읽기 모두 마지막 글을 쓴지 몇 년이 지났습니다. 올해부터는 언론기도 끊었습니다(제가 세상에 대해 뭘 아냐는 심정에서..).

어차피 제 자신의 숙성이 더해지기 까지는 언론에는 당분간 나가지 않기로 결정했으므로 아쉬울 것이 없지만, KCEF글은 다시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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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후 이런 저런 KCEF소식, 새롭게 시작할 STUDY 프로그램 안내를 자게에 차례로 올리겠습니다. 아울러 우리 KCEF와 함께할 신규 에디터도 모집합니다.

한 가지는 약속할 수 있습니다. KCEF에 글을 다시 못 올린다면 3대 영양소는 영원히 포기하겠습니다.  요즘 내 몸 안에서 나쁜JJ와 착한JJ가 싸웁니다. 나쁜 놈은 “이제 그만 다시 옜날로 돌아가자…이만하면 생체실험 충분하다”라고 틈만나면 속삭입니다. 착한 JJ는 “그 동안 저를 믿고 KCEF에 들렸던 독자/회원들 배신하는 일(글 쓴다 해놓고 안 쓴 것 등) 이젠 그만해야 되지 않느냐”라고 다그칩니다.

아, 그러고 보니 가을, 배신의 계절이 돌아왔군요. 배신…익숙한 것과 이별하는 것이지요. 남을 배신하는 것은 대부분 나쁜 일이지요. 하지만 자신을 배신하는 것은 어떨까요. 좋은 배신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 가을, 나를 배신해볼까 합니다. 몸도 마음도.

3대 영양소 공급이 2주째 끊긴 내 몸은 아직도 배신의 분노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나의 영혼은 조금씩 맑아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이 참에 몸이 아닌 마음 까지 배신하면 어떨까…

모두들, 뜻 깊은 한 학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