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과 안정은 함께 가야 한다

[글/전주성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

참여정부 출범 100일을 맞아 세상이 떠들썩하다. 언론마다 그동안의 잘잘못을 가리는 일에 분주하지만 경제분야의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가뜩이나 경제가 침체국면인데 노사문제, 부동산투기, 경기대책 등 몇 가지 분야에서 현 정부가 보여준 정책이 경제주체들에게 희망보다는 실망을 안겨준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설문지 몇개 돌리며 점수를 찍으라는 식의 평가 방식은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기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고, 평가자의 감이라는 것도 쉽게 변할 수 있다. 또한 경제성과를 따지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을 수 있다. 전문적인 사안의 경우 착시현상이 있을 수 있고, 개혁적인 정책의 경우 이기적인 반발이 객관적인 비판으로 둔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조사에서 경제에 대한 평가가 낮게 나오는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작금의 경제불안은 일시적인 경기 하강이나 기득권층의 저항쯤으로 치부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이대로 방치하면 자칫 더 큰 어려움이 올 수도 있다. 외환보유고가 넉넉하므로 지금이 1997년보다 안전하다고 보는 것은 위험한 판단이다. 오히려 지금은 과거에 비해 위험 요소는 더 많아진 반면, 이를 흡수해줄 장치나 수단은 현저하게 취약해져있으므로 잠재적인 위기 가능성이 낮다고 말하기 힘들다. 공적자금의 투입으로 은행 부실은 줄었지만 그 대가로 재정의 건전성은 악화되었다. 무분별한 소비부양책은 금융시장을 취약하게 몰아갔고 정작 소비지출이 필요한 현 시점에서는 대안이 없는 실정이다. 미국경기가 살아나 수출이 펴거나 기업심리가 회복돼 투자가 늘기 전에는 당장 경제가 나아지기 힘든 상황이다. 보다 넓게는 지난 정권에서 하다 만 구조개혁을 지속하고, 새로운 경쟁력 창출을 위한 창의적인 산업정책을 구상해야 한다.

사실 취약한 경제를 상속한 참여정부가 경제불안의 모든 책임을 떠안는 것은 공평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국민 가슴에 와닿는 비전과 전문가가 수긍하는 전략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못했다는 부정적 평가는 면하기 어렵다. 지금쯤이면 이라크 전쟁 이후의 분위기를 타고 수출과 투자도 살아나고 소멸됐던 개혁의 불씨도 다시 지펴야 할 때인데, 오히려 개혁세력과 안정세력 모두에게 매를 맞는 정반대의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

그렇다면 현 정부 경제정책의 어떤 부분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참여정부 경제정책의 핵심은 기존 경제구조의 개혁에 있다. 우선, 과거의 비효율과 불공평을 시정하기 위한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나 그 추진 방향은 대체로 적절히 설정됐다고 볼 수 있다. 중앙 대 지방(균형발전), 대기업 대 중소기업(재벌개혁), 가진 자와 그렇지 못가진 자(소득분배) 간의 지나친 불균형을 개선하는 일은 이념의 차원을 떠나 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위해 바람직한 시도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정책을 수행하는 방법론에 있어서는 미흡한 측면이 적지 않다. 개혁이란 당위론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비전과 전략이 선명해야 한다. 정부의 가용 재원이 얼마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이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정책목표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하며, 나아가 주어진 정책이 제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의 수단을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전략 차원의 청사진이 부족하기 때문에 각론으로 들어가면 정책이 체계적이고, 일관성있게 집행되기 힘든 것이다.

특히, 개혁정책의 경우는 손해보는 세력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한 정당성의 확보가 중요한데 이를 소홀히 한 채 개혁의 당위성만을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소모적인 이념 논쟁이나 집단 계층간의 갈등을 확산시킨 측면이 있다. 이는 소수정권으로서의 한계를 드러내 개혁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역효과를 초래하고 있다. 또한 관료를 움직이고 미국을 설득하고 야당의 협조를 구할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대안 제시보다는 몇 가지 제도적 변화(위원회나 태스크포스 등)에 의존해 개혁을 추구하려한 것 역시 안이한 판단이라고 볼 수 있다.

경제정책의 비전이나 전략 부재는 구조적인 개혁정책 뿐 아니라 단기적인 위기관리 능력에도 허점을 초래할 수 있다. 부동산 투기, 노사분쟁, 경기침체 문제와 같은 현안 처방에 있어서 나타난 불협화음이나 정책혼선도 반드시 주무 부처의 잘못으로만 치부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경제 전반을 포괄하는 체계적인 정책 방향과 이를 구체적으로 조율할 조정 기능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혼선이 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결국 구조적인 개혁정책이건 단기적인 경기대책이건 정책이 입안되고 조율되는 것은 하나의 체계적인 청사진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뛰어난 정책능력을 갖춘 구심점이 있다면 개혁과 안정이 구분될 필요가 없고, 이념과 논리가 혼동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개혁의 방법론에 대한 비전과 전략의 부족으로 참여정부는 집권 초기에 형성되는 밀월기간을 빠르게 소진하고 있으며, 나아가 정당한 개혁 드라이브까지 발목을 잡히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문제가 지속되면 정치가 경제를 망치는 차원을 넘어서 경제가 정치개혁이나 사회발전의 발목을 잡는 상황까지 초래될 수 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까. 많은 것을 바꿔야 한다. 첫째 경제를 보는 집권층의 시각부터 달라져야 한다. 정치개혁을 먼저하고 경제를 손보겠다는 것은 안이한 판단이다. 경제는 하루 하루가 전쟁이고 한번 망가지면 회복하기 힘들다. 사후 처방보다는 사전에 좋은 대책을 세워야 한다. 예컨대 외환위기로 악화된 소득분배가 지난 몇년 간의 서민생계 정책으로 얼마나 나아졌겠는가.

둘째 개혁의 방법론이 좀더 명확하고 체계적이어야 한다. 재분배, 지방분권, 기업개혁 등의 원론적인 개혁 방향은 타당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전략과 수단을 택할 것인지, 또한 재원이나 수단의 한계로 목표간의 충돌이 발생할 때 어디에 우선순위를 둘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밑그림이 필요하다. 개혁의 성공은 개혁의 한계를 얼마나 제대로 인식하느냐에 비례한다.

셋째, 개혁과 안정은 함께 안고가야 할 사안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지속적 성장에 대한 비전이 없이 형평을 강조하면 자칫 구호와 주장만 내세우는 정부라는 오해를 받는다. 특히, 최근의 경기침체는 단기적 경기순환, 외부요인, 경제구조의 결함이 혼재된 상황이므로 어느 한 측면만 보지 말고 정면대결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체질을 강화하며 단기부양은 안한다' 하는 식의 대립적 사고를 내세우면 시장은 그만큼 정부의 정책능력을 폄하하게 된다.

넷째 이념과 정책능력을 구분하는 것도 중요하다. 현 정부의 진보적 이념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공정한 선거 과정을 통해 선출된 정부가 자신의 정책이데올로기를 반영한 정책을 수립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정책을 이념과 이해관계가 다른 계층이나 집단에 설득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우리의 상황에서는 복지, 노동, 재벌과 같이 일견 이념성이 짙어 보이는 분야도 실제로는 경제논리에 의해 개혁이 필요한 부분이 적지 않다. 정책부실로 경제가 망가지면 결국 사회적 약자만 희생된다. '좋은 정책'이 현 정부의 이념적 목표 추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개혁의 정당성 확보에 힘을 쏟아야 한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최초의 문민정부였던 김영삼 정부, 위기극복이라는 명분이 있었던 김대중 정부에 비해 현 정부는 외생적으로 주어지는 정당성이 약하기 때문에 그만큼 집권초기의 밀월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새로운 정책을 펴기 전에 집행가능성을 먼저 고려하는 신중함과 치밀함이 필요하다.

현 정부가 겪는 어려움의 상당부분은 '신뢰의 위기' 다. 안에서 끼리끼리 하는 토론으로는 해법을 찾기 힘들고 이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힘을 받기도 힘들다. 대중적인 지지도 중요하지만 경제문제는 무엇보다 해당 분야 전문가 그룹의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시스템과 사람이 모두 핵심인 것이다. 지금은 열린 마음으로 나라 장래부터 걱정할 때다.